라틴 아메리카, 혁명 그리고 사회변혁
1. 혁명의 라틴아메리카
15세기 말 또는 16세기 초 이래 현재까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과감하게 개괄한다면 시련, 혁명, 고독의 여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혁명은 20세기 라틴아메리카의 표상이다. 멕시코혁명, 쿠바혁명, 니카라과혁명, 그리고 최근 들어‘좌파 물결’의 진원지로 떠오른 사정까지 고려한다면 라틴아메리카는 가히 혁명의 대륙이라고 할 만하다. 그중 1910년 11월 발발한 멕시코혁명은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첫 국면을 대표하는 일대 격변으로서, 흔히 러시아혁명에 앞선‘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으로 일컬어진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대사건은 시기적으로 러시아혁명을 앞설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교체를 넘어 기존 사회경제적 체제의 변혁이라는 측면에서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 불릴 만했다.
2. 20세기 최초의 혁명, 메히꼬 혁명
멕시코혁명: ‘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대사건
멕시코혁명의 배경과 원인
멕시코혁명의 배경과 원인을 파악하려면 적어도 1870년대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76년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ias, 1830~1915) 장군은 35년 뒤 혁명 세력에게 밀려날 때까지 강력한 과두지배 체제를 구축하면서 멕시코의 운명을 좌우했다. 독립 이후 50여 년 동안 지속된 정치적 혼란 속에서 ‘대(對)프랑스 전쟁의 영웅’으로 입지를 굳힌 디아스는 점차 경찰력에 의존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대외개방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디아스는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 논리를 신봉한 이른바 ‘과학파’를 등용해 유럽(또는 앵글로색슨)지향적 정책을 추진하면서, 소수의 측근과 외국기업에게 수자원과 철도 개발권을 제공하고 아시엔다(hacienda, 대농장) 위주로 농업의 상업화를 추진했다. 또 디아스의 외세 의존적 과두지배체제는 멕시코의 원주민과 혼혈인을 근대화의 장애물로 간주하고 나아가 멕시코의 인종적 또는 문화적 개조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시대적 조류 속에서 중남부 지역 여러 곳의 원주민 공동촌락은 팽창일로의 아시엔다 체제와 대조적으로 계속 약화되었다. 대다수 멕시코인들은 빈곤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북부 지역의 대농장주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세력 또한 정치적으로 배제되었다. 디아스의 과두지배 체제 아래 상업적 농업의 확대와 그에 따른 토지 없는 농민들의 증대, 중앙집권화와 특정 지역의 정치적 배제는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그리하여 배제의 정치와 중앙집권화에 반대한 북부 지역 부르주아지의 정치개혁 요구와 더불어 농업의 상업화에 반발한 중남부 농민들의 저항은 멕시코혁명의 두 축을 이루었다.
디아스의‘개발 독재’에 맞서 저항의 불씨를 당긴 프란시스코 마데로(Francisco Madero, 1873~1913)는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배제된 북부 지역의 대농장주와 중간계급의 자유주의적 개혁 운동을 대변했다. 마데로는 1910년 대통령 선거가 조직적인 부정행위로 얼룩지자‘공정선거, 재선반대’라는 구호를 내걸고‘산 루이스 포토시 강령’을 발표했다. 이 강령은 기본적으로 정치개혁의 성격이 강한 문서였지만, 제3조에‘불법적으로 획득한 모든 토지를 조사하고 법의 남용으로 취득된 모든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반환할 것’을 명시함으로써 농업개혁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는 중부 모렐로스 주에서 사탕수수 대농장의 확대에 맞서 원주민 공동촌락의 투쟁을 이끌던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1879~1919)를 혁명의 대열에 끌어들이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멕시코혁명의 전개 : 무장투쟁 국면
디아스가 망명길에 오른 뒤 마데로는 일련의 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되었지만, 1913년 2월 디아스 추종세력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 뒤 전국 각지에서 저항세력의 무장봉기가 빈발했을 뿐만 아니라 1914년 여름에는 디아스 추종세력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그들과 독일제국의 연계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미국 정부의 멕시코 개입이 이어졌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행정부는 멕시코의 주요 통관항인 베라크루스(Veracruz)를 점령함으로써 디아스 추종세력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곧이어 디아스 추종세력이 퇴장하고 정부군이 해체된 뒤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혁명분파 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사파타나 판초 비야(Pancho Villa, 1877~1923) 같은 대중적 영웅들이 돋보이는 활약을 펼쳤다. 특히 사파타 운동은 대토지 소유제, 상업적 농업의 팽창, 중앙 권력에 저항한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이었다. 사파타 운동의 목표는 한마디로‘토지와 자유(Tierra y Libertad, Land and Liberty)’(각주 : ‘토지와 자유’는 1870년대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의‘브나로드(v narod, 인민 속으로)’운동의 이상이기도 했다)의 쟁취였다. 이는 무엇보다 생존에 필요한 토지소유를 보장하고 토지의 부당한 독점을 근본적으로 일소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11년 11월, 사파타는 농업개혁 추진에 미온적이던 마데로와 결별한 뒤 독자적인 아얄라 강령(Plan de Ayala)을 통해 철저한 토지개혁의 실현을 천명했다. 사파타가 밝힌 토지개혁의 3대 원칙은 불법적으로 수탈당한 개인과 공동촌락에게 토지 반환, 공공사용을 위한 수용, 그리고‘아얄라 강령의 적’들의 토지재산 몰수였다. 사파타 운동은 공동촌락 농민들의 비정기적 동원에 의존했기 때문에 자율적인 토지 관리와 더불어 정치∙군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자치와 ‘직접민주주의’를 정치적 이상으로 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사파타 운동의 ‘자유’는 전국적 권력의 장악이라기보다는 공동촌락을 기본단위로 한 자치를 의미했다.
1917년 2월 제헌의회는 소집된 지 2개월이 지나 진보적인 성향의 새로운 헌법을 탄생시켰다. 멕시코혁명을 대표하는 문서가 된‘1917년 헌법’은 대의제 민주주의와 막강한 권한을 지닌 대통령 중심제를 표방하고, 대통령과 상∙하원의원을 포함해 모든 선출직의 재선(再選) 금지를 명시했으며 반(反)교권주의와 세속주의(3조)뿐만 아니라 토지개혁(재분배)(27조), 노동자의 권리(123조), 교육개혁(130조)과 같은 혁신적 조항들을 포함했다. 1917년 헌법의 제정 시기가 러시아혁명 이전이었고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한 노동자의 권리 조항은 미국에선 1930년대 중엽 뉴딜시대에서야 등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문서의 혁신성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헌법의 몇 가지 혁신적인 조항들은 1930년대 중엽까지 사실상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헌법 제정 이후 권력 승계를 둘러싸고 다소간 충돌이 발생했지만 1920년 12월 알바로 오브레곤(Alvaro Obregon, 1880~1928)이 권좌에 오르면서 혁명의 무장투쟁 국면은 막을 내렸다. 혁명기 10년 동안 “나뭇잎이 허리케인에 날려 죽어가듯이” 멕시코의 인구1,500만 명 가운데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다양한 저항세력이 명멸했지만 혁명의 최종 열매는 북부 지역 출신의 독립 소농과 상인 등 중소 부르주아지에게 돌아갔다. 혁명 당시 디아스 체제는 70~80대 노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지만, 혁명기를 거치면서 오브레곤과 플루타르코 카예스( , 1877~1945) 같은 30~40대의 젊은 세대가 혁명 후 체제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들은 혁명기에 분출된 대중의 개혁 요구와 열망, 예컨대 토지개혁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면서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한편 사파타의 세력은 1919년 4월 그가 암살당한 뒤 오브레곤의 세력에 흡수되어 혁명 후 체제의 농업개혁에 영향을 미쳤으나 끝내 자치의 이상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대신 1920년대에 멕시코혁명의 이념을 체제 이데올로기로 고양시키려는 국가적 기획을 통해 사파타 운동은 혁명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혁명의 제도화
여러 연구자들은 1917년 헌법의 제정 또는 1920년, 더 나아가 1940년까지를 혁명기로 인식하고 1920년 이후 시기를 그 이전의 무장투쟁 국면과 구별되는 ‘제도화 국면’으로 규정한다. 달리 말해 1910~1920년의 시기가 각 지역의 실권자들이 대중동원과 무장투쟁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고자 경쟁하는 단계라면 1920~1940년은 권좌에 오른 혁명 세력이 대중의 요구를 선택적으로 포섭하면서 권력기반을 다지는 안정화 국면이었다. ‘혁명의제도화’를 위해선 무엇보다 권력 승계 과정에서 불거지는 위기를 차단해야 했다. 1923~192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대통령직의 승계를 둘러싸고 발생한 일부 군 세력의 반란과 정치적 갈등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특히 1928년 오브레곤이 암살당한 뒤‘혁명의 최고지도자’로 떠오른 카예스는 여러 실력자들을 규합해 1929년 3월에 <국민혁명당(PNR)>이라는‘혁명 정당’을 창설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의 토대를 마련했다. 동시에 카예스는 공식적인 임기가 종료된 뒤에도 ‘혁명 정당’을 통해 정국을 좌우하고 점점 보수화하면서 혁명적 대의에서 멀어졌다.
1917년 헌법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중에, 혁명 세력의 마지막 세대인 라사로 카르데나스(1895~1970)는 토지개혁, 노동개혁, 석유자원의 국유화 등 혁신적인 정책을 통해 잠 속에 빠져든 혁명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다. 카르데나스는 집권기(1934~1940) 동안 약 1,800만 헥타르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했다. 이는 1920년 부터 전임자들이 분배한 토지 면적의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또 카르데나스는‘혁명적 민족주의의 정점’으로 여겨진 1938년 3월 외국계 정유회사의 유정 수용과 석유자원의 국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멕시코에서는 대농장 중심의 대토지 소유제와 채무노예제가 거의 해체되고, 혁명적 민족주의가 한껏 고양되었다. 그리하여 멕시코혁명은 1910년에서 1940년까지 지속된 장기(長期)의 격변으로, 그리고 카르데나스의 시대는 흔히‘멕시코혁명의 완결’로 인식되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1940년 이후 멕시코의 정치적 궤적이 카르데나스의 집권기와 비교해 얼마나 판이한 양상을 보이는지 지적하면서 카르데나스를 멕시코혁명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카르데나스가 집권기 내내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진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카르데나스는 집권 초기에 진보적 성향의 개혁 정책을 추진했지만 석유자원의 국유화 조치를 계기로 말기에는 온건 노선으로 선회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카르데나스의 시대를‘멕시코혁명의 완결’이라기보다는 일당지배 체제의 형성 단계로 파악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카르데나스는 외국계유정의 수용 조치 직후 <국민혁명당>을 <멕시코혁명당(PRM)>으로 개편하고 농민, 노동자, 교사와 하급 관리, 군인 등 혁명 참여 세력을‘혁명 정당’의 네 부문으로 통합시켜 향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될 중앙집권적 일당지배체제의 기반을 다졌다. <멕시코혁명당>은 1946년 <제도혁명당(PRI)>으로 개칭되었지만 이는 표면적인 변화에 지나지 않았고, 카르데나스가 개편한‘혁명 정당’의 기본 골격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기록적인 연속 집권의 토대가 되었다. (각주 : 이 ‘혁명 정당’은 1989년 바하칼리포르니아(Baja California) 선거에서 보수 정당인 <국민행동당(PAN)>의 후보가 처음으로 주지사에 당선될 때까지 연방 정부는 물론 주 정부의 권력을 놓친 적이 없었다. <국민혁명당>의 창설부터 무려 71년에 걸친<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은 2000년 7월 대통령 선거에서<국민행동당>의 비센테 폭스(Vicente Fox)가 승리했을 때 막을 내렸다.) 아울러 카르데나스는 ‘혁명정당’내에 동맹 체제를 구축하고 여전히 위협적이었던 군 세력을 동맹의 하나로 축소시킴으로써 혁명기 이래큰 영향력을 행사한 군부를 약화시켰다. (각주 : 정치 참여를 둘러싸고 열띤 공방을 불러일으킨<멕시코혁명당>의‘군인’부문은 1940년 12월 말 폐지되고 하급 관리로 이루어진‘민중’부문으로 흡수되었다) 이런 정치의 탈(脫)군사화는 혁명의 제도화가 낳은 또 하나의 성과로서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구별되는 멕시코 정치의 특징이 되었다.
멕시코혁명의 성격 규정
그동안 멕시코혁명의 성격에 대해 대반란, 사회혁명, 중앙집권적 혁명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된 바 있고, 지역에 따라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한 세력이 편차를 보이면서 어느 곳에서는 농민(agrarista)혁명으로, 다른 곳에선 판초 비야로 대변되는 산지인(山地人, serrano) 혁명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혁명기를 구분하고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어떤 세력을 중심으로 혁명을 파악할 것인가라는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최초의 멕시코혁명사 서술은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세력, 특히 혁명에서 승리한 북부 지역 출신의 중소 부르주아지에 의해 주도되었다. 정통해석으로 자리매김한 친(親)혁명파의 해석은 멕시코혁명을 엘리트적, 권위주의적, 사대주의적인 디아스의 구체제에 대항한 아래로부터의 사회혁명이자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혁명으로 규정했다. 혁명 후 체제의 이런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실제 혁명기 동안 지역적으로 제한된 범위에서 주목을 끈 사파타 운동은 혁명의 주역으로 재탄생했다.
멕시코의 저명한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Carlos Fuentes)는 1962년『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에서 부서지고 금이 간 혁명, 더 이상 혁명이기를 멈춘 멕시코혁명의 모순을 묘사했다. 푸엔테스는 혁명군의 중하급 지휘관이었던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멕시코인을 배신한 혁명 세력과 집권 <제도혁명당>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푸엔테스에게 크루스는 비열한 출세주의자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로서 혁명의 가치를 희생시키면서 끊임없이 자기 이익을 추구한 혁명 후 집권 세력의 표상이었다. 크루스의 출세와 죽음은 배신당한 멕시코혁명의 변질이자 죽음인 셈이었다. 베라크루스(Veracruz)에서 시작해 수도 멕시코시에서 끝나는 크루스의 생존과 출세의 여정은 16세기 초 에스파냐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나 1846~1848년 전쟁 당시 멕시코에 침입해 멕시코시의 군정장관을 역임한 미군 장군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의 침투 경로와 정확히 일치한다. 크루스는 그의‘선배’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진했던 출세가도를 그대로 따른 셈이었다. 정복자 코르테스는 멕시코 만에 접한 낯선 항구에 자기에게 익숙한 이름을 붙였다. 베라크루스, 진정한 십자가! 낯선 항구를 익숙하게 만들려는 정복자의 욕심은 오랜 세월 뒤 멕시코혁명기의 욕망의 화신 크루스에게 옮겨졌고 멕시코는 욕심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혼란스런 전쟁터가 되었다.
3. 체 게바라를 낳은 꾸바 혁명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쿠바는 미국과 에스파냐의 전쟁 이후 1902년 독립하였지만, 미국자본에 종속된 사탕수수 단일작물재배 경제가 형성되어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토지가 미국자본과 쿠바인 대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독재정권의 부패도 심화되어 여러 차례의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미국의 비호하에 진압되었다.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의 주도하에서 몬카다병영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면서 게릴라전을 포함하는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노선을 가진 ‘7월 26일 운동’이 결성되었다.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로 상륙한 후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의 17명이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출발한 게릴라운동은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정권을 축출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이루게 되었다. 초기에는 토지개혁 등 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나, 1960년 후반 이후부터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미국기업의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단행하였다. 4월 16일 카스트로가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1953.7.26 - 쿠바 혁명 발발 - 카스트로가 (산티아고데쿠바 근처의) 몬카다 병영을 습격
피델 카스트로가 주도하는 반 바티스타 세력이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요새병영을 공격하면서 1959년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할 때까지의 6년간 싸움이 시작됐다. 모두 160명인 카스트로의 소규모 군대는 1000명의 수비대가 있는 산티아고 부근의 몬카다 병영을 공격했다. 공격은 실패했고 혁명군은 도주했다. 혁명군과 관계없는 사람들까지도 체포되거나 살해됐다. 카스트로도 체포됐으나 5월, 76일 만에 석방됐다.
아바나로 돌아간 카스트로는 비폭력적인 선동만으로 행동을 자제했으나 결과에 실망, 추종자들을 이끌고 멕시코에서 다음 기회를 준비했다. 멕시코에서 체 게바라를 만나 함께 혁명을 준비했던 카스트로가 82명의 대원을 이끌고 다시 쿠바로 향한 때는 1956년 11월이었다. 이 시도도 실패로 돌아가 대부분의 대원들은 살해됐거나 체포됐다. 12명만이 안전지대에 도착했고 그 가운데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도 포함돼 있었다.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가 혁명세력을 조직해 산티아고데쿠바 시에 주둔해 있던 몬카다 군병영을 공격하면서 쿠바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건너가 7·26운동 조직을 지휘하다가 1956년 12월 2일 다시 쿠바의 오리엔테 주에 상륙했다. 그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 동생 라울, 그리고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등과 함께 게릴라전을 벌였다. 1958년 12월 31일 마침내 바티스타가 쿠바를 떠나면서 카스트로는 승리를 거두었다. 1961년 쿠바 공산당의 서기장에 오른 카스트로는 이후 쿠바에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했다. 이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바 망명자들의 피그스 만 침공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은 더 이상 카스트로 정부의 전복을 기도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지만,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한 미국중앙정보국(CIA)의 활동은 한동안 이어졌다.
1956.12.2 -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일행, 그린마호로 쿠바 상륙
1956.12.2 - 카스트로 등 혁명파 쿠바에 상륙, 쿠바혁명 시작
1956년 12월 2일, 멕시코의 베라크루스에서 비밀리에 출항한 작은 요트 그린마호에 승선한 82명의 게릴라들은 어둠 속에서 쿠바 상륙을 시도하였으나 바티스타 정부군에게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겨우 12명의 게릴라만이 목숨을 구하여 산으로 탈출하였다. 그 게릴라들 중에는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그리고 체 게바라가 끼어 있었다.
그로부터 만 2년이 지난 1959년 1월 1일 쿠바혁명군의 선발대가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였으며, 그로부터 또 일주일 후 쿠바 혁명의 최고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실질적인 쿠바의 실세로 군림하게 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세계 최장수 집권기간인 45년간의 기나긴 독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전세계 혁명 역사상 그렇게 적은 인원으로 그렇게 단기간에 혁명을 성공하고, 또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집권을 이룬 집단은 없었다. 더구나 바로 옆의 초강대국 미국의 속을 그토록 오래 썩힌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19세기에 제국주의를 추종했던 미국이 강점한 땅 중, 속을 안썩힌 곳은 하와이, 괌 정도이고 나머지 필리핀이나 쿠바 그리고 푸에르토리코는 오랜 기간동안 미국의 속을 엄청 썩혔다.
- Rebel Attack on Moncada Barracks
1959.1.1 - 카스트로 쿠바혁명 성공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의 주도하에서 몬카다병영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면서 게릴라전을 포함하는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노선을 가진 ‘7월 26일 운동’이 결성되었다.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로 상륙한 후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의 17명이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출발한 게릴라운동은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정권을 축출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이루게 되었다. 초기에는 토지개혁 등 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나, 1960년 후반 이후부터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미국기업의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단행하였다. 4월 16일 카스트로가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1959.1.1 - 쿠바 혁명 성공
1959년 1월 1일 쿠바에서는 독재자 바티스타(Batista, Fulgencio, 1901~1973)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고 카스트로(Castro, Fidel, 1926/27~ )가 정권을 잡았다. 쿠바 혁명은 뇌물수수, 부정부패, 아프리카계 쿠바인의 사회적 불평등 등 오랜 기간 누적되어온 쿠바의 내부적 모순이 폭발한 결과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들은 국가의 부를 횡령해 해외로 유출시켰고 공포정치로 국민을 다스렸다. 능률적인 운용으로 한때 국민의 지지를 받던 바티스타 이 살디바르 정권마저 2차 집권 때는 부패와 독재로 국민의 지지를 상실했다. 바티스타 정권은 강력한 공포정치로 반대자들을 억압하고 카스트로 반군을 거의 전멸시키기도 했으나 결국 카스트로가 이끄는 7·26운동 조직에 의해 무너졌다. 쿠바 혁명 이후 카스트로는 소련과 수교하고 공공부문 국유화, 교육과 의료 무상 제공 등 광범위한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피그스 만 침공, 경제 교류 중단 등의 결과를 불러왔다. 그러나 이후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핵미사일 철수를 조건으로 더 이상 카스트로 정부 전복 시도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1961.4.17 - 미국, 쿠바 피그만 침공…사흘 만에 대패
- 피그만(The Bay of Pigs) 침공사건
1961년 4월17일에 쿠바의 망명객 1,500명이 미국의 정보기관에 의해 무장되고 훈련받아서 쿠바의 남쪽 해안에 있는 피그만에 상륙하였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망명객들은 쿠바인들이 카스트로에 반대하여 궐기하면서 그들을 환영할 것을 기대하였었다. 그러나 그러한 반란상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은 48시간 동안 계속되었었는데 첫날 침입자들은 쿠바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으나 둘째날은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후퇴하였고, 카스트로의 공군이 무기 적재함을 침몰시켰기 때문에 탄약 보급은 떨어져갔다. 망명객들은 단지 니카라구아에 본부를 두었던 취약한 비행단의 활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정규 공군의 지원사격이 없이는 침임자들의 비행기가 어디에라도 상륙하여 그들을 재 보급시킬 수 없었다.
이 계획은 아이젠하워 때 세워졌으나 케네디가 그것을 미국 군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승인하였던 것이다. “케네디는 이 계획에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미군은 투입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수차례 밝혔었다. …그러나 CIA와 쿠바 망명객들은 아마도 때가 오면 케네디가 별 수없이 미군을 파병하고야 말 것이라고 믿었다"고 역사가 슐레진저(Arthur Schlesinger)는 술회하였다. 결국 그러한 기대는 허사로 돌아갔으며, 침입 이틀 후 탄약 부족으로 114명이 사망하였고, 그 나머지 망명여단은 쿠바군에 항복하였다.
1961.4.16 - 카스트로, 쿠바 사회주의 국가 선언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의 주도하에서 몬카다병영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면서 게릴라전을 포함하는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노선을 가진 ‘7월 26일 운동’이 결성되었다.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로 상륙한 후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의 17명이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출발한 게릴라운동은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정권을 축출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이루게 되었다. 초기에는 토지개혁 등 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나, 1960년 후반 이후부터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미국기업의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단행하였다. 4월 16일 카스트로가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4.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
1821.6.24 스페인군에 맞서 베네수엘라 해방의 결정적 계기가 된 승리를 거두다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베네수엘라 바르가스주(州) 마이케티아에 있는 국제공항으로, 베네수엘라의 대표적인 국제공항이다. 시몬 볼리바르 대학교. 역시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부근에 있는 공립대학교다. 비단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을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 ‘해방자이자 국부(國父) 볼리바르’ 그를 빼놓고 중남미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스페인 식민 통치에 대항하는 크리올료들
1821년 스페인 전투를 이끄는 볼리바르
1821년 6월 24일 카라카스 외곽의 카라보보 평원. 볼리바르가 이끄는 6,500명의 부대가 스페인 군대와 맞섰다. 불리바르는 승리했다. 이날의 승리는 베네수엘라 해방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6월 29일 볼리바르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카라카스에 입성했다. 남미 해방의 깃발은 여기에서 멈출 수 없었다. 이듬해 1822년 키토 교외 피친차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볼리바르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에콰도르가 해방되었다.
중남미를 식민 지배한 스페인은 부왕령(副王領) 제도를 통해 식민지를 나누어 통치했다. 부왕은 스페인 국왕을 대신해 식민지를 다스리는 일종의 총독이었다. 19세기 초 중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는 멕시코(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페루 부왕령, 누에바그라나다(콜롬비아) 부왕령, 그리고 리우데라플라타 부왕령(아르헨티나 지역에 해당)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으로 식민지에 대한 스페인의 통제권이 약화되었고, 이를 계기로 1810년경부터 남미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독립운동의 실질적인 계기는, 경제적 특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본국 스페인 상인과 식민지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부왕 및 본국 세력, 그리고 자유 무역을 추구하며 정치적 지배력까지 확보하려는 크리올료(중남미로 이주한 스페인계 백인 후손. 즉 중남미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주민) 사이의 심각한 대립이었다.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태어난 페닌술라르에게 공공연히 멸시 당했던 크리올료는 식민지 사회에서 상층에 속하면서도 관료제도나 교회조직에서 배제되었다. 1810년 베네수엘라의 크리올료들은 스페인이 파견한 군 사령관을 추방하고 독자적인 대표자 회의를 구성하기도 했다.
군대 결성, 독립 투쟁에 나서다
긴 이름 콘테스트에 나가면 수위를 다툴 법한 그의 전체 이름은 다음과 같다.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리바르 이 팔라시오스 폰테 블랑코(Simon Jose Antonio de la Santisima Trinidad Bolivar y Palacios Ponte Blanco). 다 읽자면 숨 가쁜 그 이름만큼이나 그의 삶은 숨 가쁜 삶, 늘 치열하게 한 시대의 고뇌의 중추를 날카롭게 건드리며 그 중추의 아픔을 제 아픔으로 삼는 삶이었다. 출생은 유복했다. 유력한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그러나 늘 이등시민일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크리올료였던 그는 일종의 본국(本國)인 스페인 사람들에게 이등시민 취급을 받았던 것. 경제적 여건이 아무리 넉넉해도 정치적으로는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1824년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볼리바르
가족사도 불행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부 댁에서 살다가 외삼촌 집에 맡겨졌지만 엄한 성격의 외삼촌과 갈등했고, 결국 결혼한 큰 누나 집에 살게 되었다. 큰 누나 집에서 볼리바르는 가정교사 시몬 로드리게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로드리게스는 계몽주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볼리바르는 가정교사를 통해 유럽의 자유, 평등, 계몽, 해방의 사상과 만날 수 있었다. 역시 누나가 소개한 인문학자이자 교육자 안드레스 배요도 볼리바르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볼리바르는 18살 때 결혼했지만 열 달 만에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실의에 빠진 그는 유럽을 여행하며 나폴레옹 전성기의 유럽 상황을 목격했다.
1807년 귀국한 볼리바르는 1810년부터 남미를 스페인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연이어 실패를 겪고 1814년 왕당파에게 참패한 뒤 검거령을 피해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볼리바르는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독립한(중남미 최초의 독립국) 아이티 공화국과 영국인들의 지원을 받아 다시 독립 운동에 나섰다(아이티는 노예제 폐지를 대가로 바라면서, 영국은 새로운 시장의 필요성 때문에 볼리바르를 지원했다). 1817년부터 남미 독립운동세력,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독일인 등으로 구성된 혼성 부대를 이끌고 베네수엘라의 안고스투라에 거점을 마련한 볼리바르는, 1819년 2월에 독립운동세력을 결집시켜 의회를 구성하고 혁명정부수립도 공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대세를 바꿀만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한 상태였다.
'대(大)콜롬비아'구상 실현을 위한 분투
1819년 5월 26일 볼리바르는 2,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누에바그라나다(콜롬비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난관은 비 때문에 허리까지 물이 차오른 초원저지대였다. 천신만고 끝에 초원저지대를 통과한 6월 중순, 이번에는 안데스 산맥이 막아 섰다. 추위, 고산병, 험준한 계곡, 물 부족에 시달리며 안데스를 넘었다. 7월에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볼리바르는 8월 7일 보고타 근처 보야카에서 결전을 치렀다. 눈부신 승리였다. 보고타에 입성한 볼리바르는 임시정부 대통령에 추대됐고, 이때부터 그는 ‘해방자’ 칭호로 일컬어졌다.
이제 볼리바르는 스페인 식민지인 베네수엘라, 누에바그라나다(콜롬비아), 키토(에콰도르) 등을 하나의 연방으로 묶는 대(大)콜롬비아 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1807년 귀국하기 직전 볼리바르는 짧은 기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남미가 독립을 쟁취한 뒤 미국처럼 합중국이 되어야 한다는 구상을 그 때부터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미의 어느 특정 지역, 개별 국가 단위의 독립이 아니라 남미 전체의 독립을 추구했던 것도 대콜롬비아 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1819년 12월 군사 지도자들과 의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볼리바르의 구상이 승인되었고, 볼리바르는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미국의 연방 정부를 모델로 삼은 대(大)콜롬비아 공화국의 탄생이었다
모든 정치적 권한과 거액의 연금을 스스로 포기하다
1823년 9월 리마에 입성하여 이듬해 12월에 최종적으로 페루를 독립시키고 상(上)페루(불리비아) 지역도 해방시킨 때가, 볼리바르의 일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였다 (볼리비아라는 국호는 볼리바르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영광의 정점은 곧 내리막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1825년 보고타로 돌아온 볼리바르는 자신의 대콜롬비아 구상이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베네수엘라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독립은 쟁취했으나 독립 이후의 국가 건설에 대해서는 각 지역이나 계층, 신분에 따른 이해관계가 대립했던 것. 크리올료들이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어 지역마다 대립했고, 유럽 국가들은 강력한 통일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견제했다. 1826년 볼리바르의 제창으로, 새로 독립한 남미 여러 나라의 평화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연맹을 결성할 목적으로 파나마 회의가 열리기도 했지만, 각국 간의 대립과 이해관계가 얽혀 1830년 해체되었다.
모든 정치적 권한과 거액의 연금을 스스로 포기하고 카리브 해안의 별장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 볼리바르
다양한 이해관계의 대립 속에 볼리바르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미수에 그치는 사건도 일어났다. 볼리바르는 주동자를 국외 추방하고 나머지 관련자를 석방하는 관대한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1830년 4월 27일, 볼리바르는 대통령직과 후계자지명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한을 포기하겠다는 서한을 의회에 보냈다. 거액의 연금을 평생 지급하겠다는 의회의 제안도 거절했다. 그리고 보고타를 떠나 카리브 해안의 산타마르타로 떠나 자신에게 호의적인 인사가 제공한 별장에 칩거했다. 결핵이 심각하게 악화된 상태였다. 1830년 12월 17일, 47세를 일기로 볼리바르는 세상을 떠났다. 입관을 준비하던 프랑스인 주치의는 볼리바르가 입고 있던 셔츠(그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셔츠였다)가 심하게 해진 것을 발견했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바보"인 '광복군'이자'독립군'
시몬 볼리바르. 그는 자신의 신념에 더 없이 충실했던 한 사람의 ‘광복군’이었다. 그는 해방자로서의 숭고한 명예만을 원하고 권력과 부를 초개처럼 여겼던 한 사람의 ‘독립군’이었다.
“저는 아주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 스페인 국왕 폐하의 대리인으로 파견된 오만불손한 총독들을 저는 뼛속까지 경멸했습니다. 우리가 해방을 쟁취하기만 한다면 우리 공화국의 통치자로 왕을 추대하자는 의견에 결연히 반대할 생각입니다. 설사 저 자신에게 왕이라는 직함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그보다는 차라리 해방자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기억되길 바랄 것입니다. 해방자라는 칭호야말로 동료 시민들이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칭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소망하던 모든 것들을 이루어낼 수 없었던 점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충직한 군인처럼 저는 죽는 그 순간까지 내 원칙을 사수하였습니다.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세 명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두 번째는 돈키호테 그리고 바로 나 볼리바르입니다. 아메리카를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혁명을 위해 싸운 인간은 결국 바다에서 쟁기질을 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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